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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개

‘崇禎紀元後再甲子四月摹’ 라는 묵서가 있는 측면전신좌상은 1744년 작품으로, 『영당기적』에 ‘崇禎紀元後, 再甲子四月, 影子移摹四本, 正面一仄面三. 畵師張敬周’라고 밝혀져 있어 장경주의 작품으로 확인된다. ‘崇禎紀元後三戊申二月摹’라는 묵서를 지닌 1788년작 윤증초상 2점은 『영당기적』의 내용을 통해 이명기가 모사했음을 알 수 있다. '영당기적'에 따르면 정면 1본과 측면 1본은 신법을 가미하여 그리고, 구본의 화법을 후대에 전하지 않을 수 없어 구법을 따라 측면 1본을 그렸다(故倣甲子正面點化之例, 略加新法, 摹出正仄各一本, 而舊本畵法, 亦不可不傳於後. 故又出仄面一本, 純用舊摸法)고 한다. 이명기가 제작한 현전하는 초상화 2점은 장경주 필 윤증상과 그 모습이 흡사한 구법에 따라 그린 측면상과 이명기의 개성적 화풍으로 그린 입체표현이 선명한 신법의 측면상이다. 정면과 측면의 흉상 2점은 화면에 묵서가 남아있지 않아 제작연대를 정확하게 알 수 없으나 정면상과 측면상은 같은 비단에 같은 화가의 솜씨로 추정된다. 측면상을 전신상과 비교해 보면 크기나 기법이 장경주가 그린 초상화와 같다. 초상화와 함께 전하는『영당기적』은 윤증 초상의 제작과 관련된 기록을 담은 필사본으로, 1711년 卞良이 윤증의 초상을 처음으로 그렸던 사례부터 1744년 장경주, 1788년 이명기, 1885년 이한철이 모사할 때까지 4번의 제작사례를 기록하였다. 그 내용은 제작일정 및 제작된 초상의 수, 구본 및 신본의 봉안과정 등을 상세히 담고 있다. 조선시대 사상사에서 윤증이 차지하는 비중과 함께 현존하는 장경주와 이명기가 그린 <윤증초상>은 조선후기를 대표할만한 뛰어난 회화적 격조를 지니고 있어 중요성을 지닌다. 아울러 '영당기적'은 초상화 제작과 이모과정 그리고 세초의 전통을 알 수 있는 귀중한 자료이다. 보물로 지정 예고된 이들 작품 외에도 종가에는 1919년 및 1935년작 전신좌상 및 소묘초본이 여러 점 전하고 있다. ㅇ 규격(세로x가로) - 1744년작(전신) : 111x81cm(화면), 190.1x101.0cm(전체) - 1788년작 1(전신) : 118.6x83.3cm(화면), 182.2x100.3cm(전체) - 1788년작 2(전신) : 106.2x82cm(화면) - 소상(2점) : 59 x 36.2cm(정면), 59 x 36.2cm(측면) - 영당기적 : 36.3 x 26.3cm 율곡 이이·우계 성혼·사계 김장생·정암 조광조·퇴계 이황·우암 송시열 등의 선현에게 제사를 지내고 후학을 교육하기 위해 세운 서원이다. 이이(1536∼1584)는 강릉 오죽헌에서 태어났다. 어려서부터 어머니인 신사임당으로부터 학문을 배웠으며 아홉 번의 과거에 모두 장원급제하였다. 그는 이황과 더불어 조선 성리학을 대표하는 학자로, 원리를 중시한 이황에 맞대어 경험을 중시했다. 성혼(1535∼1598)은 과거에 응시하지 않고 학문에만 전념하였다. 젊어서부터 이이와 학문을 교류하였으며 많은 벼슬자리에 추대되었으나 거절하다가 이이의 권유로 관직생활을 시작했다. 이 서원은 이이와 성혼을 기리기 위해 인조 4년(1626)에 황산서원이라 하여 세웠다. 후에 김장생을 추가하였으며 현종 6년(1665)에 임금으로부터 ‘죽림’이라는 이름을 받아 사액서원이 되었고 조광조·이황·송시열의 위패를 추가했다. 그 뒤 흥선대원군의 서원철폐령으로 철거되었다. 1946년에 제단을 만들어 제사를 지내오다가 1965년 사우를 다시 세웠다. 서원의 건물은 출입구인 홍살문과 외삼문을 통하면 동재, 서재, 내삼문, 사우가 있다. 사우의 오른쪽에는 죽림서원의 중건비와 황산서원의 지비를 세워 놓았다. 사우는 앞면 3칸·옆면 1칸 규모이며, 지붕은 옆면에서 볼 때 사람 인(人)자 모양인 맞배지붕으로 꾸몄다. 문묘에 모시고 있는 선현들만 모신 서원으로, 음력 3월 15일과 9월 15일에 제사를 지내고 있다. 죽림서원은 조선시대의 사설 교육기관으로 선현(先賢)에 대한 봉사(奉祀)와 후진을 양성하는 교육적 기능을 겸하여 설립된 것이다. 죽림서원은 1626년(인조 4년) 창건하여 황산서원(黃山書院)이라 하고 율곡 이이(李珥), 우계 성혼(成渾) 양선생을 배향해 오다가 후에 사계 김장생(金長生)을 추배 하였으며, 1665년(현종 6년)에 죽림서원으로 사액(賜額)을 받고 정암 조광조(趙光組), 퇴계 이황(李滉), 우암 송시열(宋時烈) 3선생의 위패를 추배하였다. 1871년(고종 8년)에 흥선대원군의 전국 서원 훼철령에 의해 폐철되었다가 유림들의 공의(公義)에 따라 1946년 단소(壇所)를 설단(設壇)봉향해 왔다. 1965년 정면 3칸, 측면 1칸의 맞배식 건물로 사우(祠宇)를 재건하였고 유림들에 의해 음력 3월 15일과 9월 15일 제향을 행하고 있는데 이 서원은 문묘(文廟)에 배향되어 있는 현인(賢人)들만을 모신 서원이다. 죽림서원은 1984년 5월 17일 문화재자료 제75호로 지정하여 관리중이며 죽림서원은 홍살문을 입구로 하여 외삼문, 동서 양재(兩齋), 내삼문, 사우가 배치되어 있으며 사우의 오른쪽에 죽림서원 중건비와 황산서원 지비가 세워져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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